[루키=박상혁 기자] ①편에 이어..

잘 나가던 삼성 영업사원에서 월 70만원의 지도자 복귀

회사에 다니다 군대를 갔지만 제대 후 업무 복귀를 약속받은 상태라 크게 부담은 없었다. 그러다 군복무 중이던 1997년에 갓 출범한 프로농구 중계를 보게 됐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만 보다가 문득 ‘저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제대 후에는 회사로 복귀해 영업일을 한참 했다. 연차도 쌓이면서 연봉도 제법 받을 때 였다. 
 
그러던 중에 정경구 선배에게 전화를 받았다. 급하게 만나자는 말에 성남으로 찾아갔더니 당시 낙생고를 맡던 박성근 감독이 성균관대로 옮기는 데 그 자리를 맡아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급여는 얼마를 줄 거냐?’고 물으니 월급이 70만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루만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집에 왔고 다음날 아침 회사에 가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사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회사에서도 말렸고 어머니도 엄청 우셨다. 그래도 내가 있을 곳이 회사는 아닌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내 마음대로 짐을 싸서 낙생고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2년 동안 명절에도 집에 안 가고 학교에만 틀어박혀서 선수들을 가르쳤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어려웠다. 잠시 농구를 떠나 있었으니까. 그래도 용산에서 배운 것 가지고 했다. 일단 뛰는 것과 수비를 강조하면서 타이트하게 운동을 시키니까 선수들이 못 견뎌했다. 그때는 하루에 4번 운동을 했는데 정말 밥만 먹고 훈련했다. 너무 힘들어서 선수들이 도망도 가긴 했지만 우승도 한 번 하고 계속 결승전까지는 가는 전력이 됐다.  

그런 와중에 용산고에서 제의가 왔다. 양 선생님이 그만두는데 그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지만 스승이 그만두는 자리를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못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용산중에서 다시 오퍼가 왔고 중학교는 가서 1년 정도를 있었다. 그러다 박광호 감독의 제안으로 국민은행 여자농구단에 1년 있다가 팀을 나와 쉬고 있을 때 용산고 학부형들이 나를 찾아와 중학교를 다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결국 등쌀을 이기지 못해 6개월만 봐주겠다고 해서 갔는데 막상 가보니 용산고가 엉망이 돼 가고 있었다. 양 선생님이 관둔 후에 제자들이 오는데 하나같이 1년을 못 채우고 관두는 거였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맡게 됐고 부임 다음날 머리를 싹 깎은 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농구부 일에만 몰두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못할 짓을 참 많이 했다. 모교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방에서 좋은 선수들을 모조리 스카우트했으니까. 정희원과 김태홍, 송수인, 박대남 등 모두 경상도 지역이나 용산중이 아닌 다른 중학교 출신의 선수를 싹쓸이했다. 선수를 뺏긴 한 지도자는 나에게 전화로 ‘밤길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날렸을 정도였다. 배재 출신인 김태홍을 데려오면서 얼굴을 붉힌 배재고 농구부장 출신 선배와 3~4년 전에야 관계를 풀었을 정도로 나는 모두에게 원망의 대상이자 공공의 적이었다. 대신 그러면서 팀 성적은 조금씩 나기 시작했고 공격적인 스카우트를 한 지 3~4년이 돼서야 경복, 휘문과 더불어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상범 감독과의 인연, 그리고 프로에서의 각오

내가 DB의 수석코치로 오게 되면서 많은 분들이 나와 이상범 감독님과의 인연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것 같다. 감독님과는 2년 터울의 선후배로 중고교 때부터 알았다. 고교 때만 하더라도 용산고와 대전고 소속으로 맞대결도 많이 했고 대학 진학 후에는 연고대로 맞대결을 펼쳤다. 

연대나 고대 모두 대학연맹전과 정기전까지 일정이 비슷하다보니 휴가 기간도 비슷했다. 그러면 둘이서 자주 어울리며 돌아다녔다. 되돌아보면 감독님과 깊은 친분을 맺게 된 것이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내가 고대 1학년 때 감독님이 연대 3학년이었는데 그때는 같이 술 마시고 돈이 없어 연고대 숙소에서 잘 때 였다. 사실 이게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당시는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감독님이야 3학년이라 학교 선배들에게 터치를 받지 않았지만 1학년인 나는 달랐다. 고대 1학년이 연대 숙소에서 잤다고 선배들한테 야구 방망이로 엄청 맞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기억이 있어 나이를 먹고도 친하게 지냈다. 내가 고려대 코치를 하다 나오려는 시점에 감독님과 만났는데 감독님은 당시 일본의 고등학교 팀 인스트럭터로 활동하실 때였다. 그때 재회한 뒤 감독님이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는데 그게 정말로 현실이 됐다. 

감독님과의 호흡은 큰 문제가 없다. 코치가 기본적으로 감독한테 맞추는 위치기도 하지만 크게 터치하는 부분이 많지 않으시다. 훈련이나 전술에서 큰 틀만 던져놓으시고 그 안에서 나와 김성철 코치가 스스로 풀어가게끔 하신다. 또 코치로서 어떤 조언이나 제시를 할 때도 거의 다 받아들여주시는 스타일이다. 

지난 시즌 DB가 정규리그 우승과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거뒀지만 올 시즌은 다소 힘든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실 지금의 경기력이 진짜 우리의 경기력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아직은 팀이 리빌딩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나무로 치면 가지만 잘랐지 새로운 걸 심지 못했다. 새로운 선수를 데려올 방법이 FA 영입, 트레이드, 신인 드래프트 밖에 없는데 주변 여건과 상황이 있어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내실을 기하는 것이 첫 번째인 것 같다. 우리 선수들이 발전이 아주 더디지만 그래도 발전하게끔 만들어야 하는 게 첫 번째가 아닌가 싶다. 

내가 추구하는 지도 철학은 어차피 농구는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수비를 해야 한다는 주의다. 공격 농구가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수비 농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과거 고교팀을 맡았을 때도 훈련의 반 이상은 수비에 할애했다. 공격에서는 속공 같은 빠른 공격의 횟수를 늘리는 걸 선호한다. 이렇게 완벽한 수비와 빠른 공격을 하려면 몸이 돼야 하는데 그래서 체력 훈련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선수들의 피지컬도 좋고 훈련 환경도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늘릴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드물게 아마농구에서만 있다가 프로농구에 왔다. 그런 만큼 내가 잘 해야한다는 생각이 크다. 그래야 지금 아마추어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나 같은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이 생기고 그것을 위해서 더 노력을 할 수 있으니까.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노력하고 싶고 또 노력할 것이다. 

이상범 DB 감독
좋은 지도자인 동시에 내 입장에서는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석코치다. 나는 시즌이나 비시즌이나 훈련에서 선수들을 가르칠 때 세세한 부분까지 터치하지 않는다. 내가 큰 틀을 잡아서 알려주면 세세한 부분을 이효상 코치가 선수들에게 가르치는 편이다. 시즌 때 경기를 치를 때는 상대팀 전술이나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많이 캐치해 알려준다. 고교와 대학 등 아마추어 농구에서 잔뼈가 굵어 현재 KBL에서 뛰고 있는 웬만한 국내선수들은 다 꿰고 있다. 우리 팀의 김태홍이나 정희원 같은 경우는 직접 가르치기도 한 제자들이다. 우리팀 뿐 아니라 다른 팀 국내선수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 팀 훈련을 할 때나 상대팀에 맞춰 전술을 짤 때 큰 도움이 된다. 평소 내 말도 잘 따라주고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신뢰가 가는 수석코치다. 

김태홍 DB 주장
굉장히 열정적이시고 불 같은 성격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츤데레' 같은 스타일이시다. 겉으로는 되게 강하게 하시면서도 속으로는 좋은 마음씀씀이로 선수들을 대해주신다. 개인적으로는 고교 때 은사인데 그때는 사실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 할 정도로 무서웠다. 그러나 대학 진학 이후 연습경기 때 장난도 치고 개인적으로 연락도 드리면서 차츰 친해진 것 같다. 지금은 제가 나이도 먹고 결혼도 해서인지 성인으로서 또 프로선수로서 존중해주신다. 주장으로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가교 역할을 하는데 이효상 코치님이 어떤 스타일이고 어떤 걸 원하시는지 잘 아니까 후배들이나 선수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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