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 편집부 = 프로 선수들은 구단과 팬들의 큰 기대를 받으며 데뷔한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이 훨씬 더 많다.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 뜻밖의 사고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기대에 비해 N%가 부족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그 첫 번째 주인공은 글렌 로빈슨이다.

(※ 월간 루키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글렌 로빈슨 | GLENN ROBINSON

출생 : 1973년 1월 10일 (인디애나주 게리)
신체조건 : 201cm, 109kg
출신대학 : 퍼듀
데뷔 : 1994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밀워키)
소속팀 : 밀워키 -> 애틀랜타 -> 필라델피아 -> 샌안토니오
수상실적 : 올 루키 퍼스트팀, 올스타(2회), 우승(1회)
통산기록 : 11시즌(총 688경기) 14,234득점, 4,189리바운드, 1,879어시스트 / 경기당 평균 20.7득점, 6.1리바운드, 2.7리바운드, 1.2스틸 0.6블록슛, 3점슛 성공률 34.0%

★ 화려했던 아마추어 시절

로빈슨은 미국 인디애나주 북부의 게리시(市)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흑인선수들처럼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더군다나 당시 게리는 산업의 붕괴로 실업률과 범죄율이 치솟던 살기 힘든 도시였다. 주변은 온통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나쁜 요소들로 가득했다. 무엇이든 건실한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교도소를 들락날락거리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었다. 바로 로빈슨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로빈슨의 어머니는 사실상 홀로 아들을 어렵게 키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로빈슨은 농구에 타고난 재능을 지녔다.

NBA 선수치고 화려한 아마추어 시절을 보내지 않은 선수는 없다지만, 로빈슨은 화려한 정도를 넘어섰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9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학교농구부에 가입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경우였다. 하지만 재능의 힘은 대단했다. 로빈슨은 단시간 내에 지역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로 성장했다. 

1991년 인디애나주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미스터 인디애나 바스켓볼 어워드’를 수상한 로빈슨은 퍼듀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그는 ‘빅독(Big Dog)’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며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됐다. 1992-93시즌 로빈슨은 NCAA에서 가장 강한 공격력을 지닌 선수였다. 경기당 평균 24.1득점, 9.2리바운드, 3점슛 성공률 40%, 이것이 신입생 로빈슨의 성적표였다.

2학년 때 그의 득점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에 따라 상대의 더블팀 수비는 일상이 됐다. 로빈슨은 그 와중에도 경기당 평균 30.3득점을 올리며 NCAA 디비전1 득점왕에 올랐다. 존 우든상, 네이스미스 어워드, 빅10 컨퍼런스 최고선수상 등 아마추어 선수로서 받을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상을 독차지했다. 

그에게 엄청난 기대가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이클 조던의 은퇴 후 새로운 영웅을 찾던 NBA와 매스컴은 그를 주목했다. 일각에서는 “샤킬 오닐과 로빈슨이 조던의 뒤를 이어 가장 상품성이 큰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런 큰 기대를 안은 로빈슨은 2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프로 진출을 선언했다.

 

★ 2%가 부족했던 밀워키의 희망

밀워키 벅스는 1994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로빈슨을 지명했다. 로빈슨은 제이슨 키드(댈러스 매버릭스), 그랜트 힐(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을 각각 2, 3순위로 밀어냈다. 당시 로빈슨이 얼마나 큰 기대를 모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 밀워키가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신인을 지명하기는 1977년 켄트 벤슨 이후 17년 만의 일이었다.

또한 밀워키는 1991-92시즌을 기점으로 내리막을 걷고 있었기에, 로빈슨은 프랜차이즈를 구원할 ‘구세주’로 각광받았다. 팬들은 빈 베이커와 글렌 로빈슨이 NBA 최고의 포워드라인을 구축할 것으로 기대했다. 벅스는 슈퍼루키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팀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을 딛고 달려온 로빈슨은, 프로선수로 성공해 지긋지긋한 가난에 대해 보상받고 싶어 했다. 이러한 의지가 지나쳤던 탓인지 그는 계약기간 13년, 총액 1억 달러의 파격적인 계약을 요구한다. 연봉이 아닌 계약총액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선수들에게 1억 달러는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엄청난 액수였다(오죽하면 당시 스포츠와 전혀 관계없는 한 인문사회 분야의 국내 서적에도 그의 이야기가 소개될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는 대학시절 거둔 성공으로 인해 한없이 콧대가 높았고, 태도도 거만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로빈슨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당초 요구에서 물러나 계약기간 10년, 총액 6,800만 달러에 합의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역대 신인계약 중 최고 액수에 해당했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데뷔했지만 그의 재능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로빈슨은 리복과 후원 계약을 맺었고, 데뷔 시즌부터 평균 20득점 이상(21.9득점)을 올리며 단번에 스타로 자리잡았다. 수비가 붙으면 제쳐내고,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점프슛을 성공시키는 그의 공격력은 NBA에서도 통했다.

하지만 밀워키는 34승 48패로 동부컨퍼런스 9위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팬들은 로빈슨이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지 못하자 적잖이 실망했다. 신인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이다. 로빈슨은 1994-95시즌 신인상(제이슨 키드, 그랜트 힐 공동 수상)마저도 놓치며 다소 아쉽게 신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 용두사미의 커리어 엔딩 

로빈슨 언제든 꾸준히 20득점을 올려줄 수 있는 득점원이었지만, 밀워키의 성적은 한동안 답보 상태였다. 더군다나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탓에 그에 대한 스포트라이트 역시 점점 시들어져 갔다. 

그러던 그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조지 칼 감독의 지도 아래 레이 알렌, 샘 카셀과 함께 ‘빅 3’를 이뤘을 때부터였다. 로빈슨은 1998-99시즌에서야 데뷔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고, 이 무렵 올스타(1999-00, 2000-01시즌)에도 두 번이나 선정됐다. 대학시절 받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던 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빅 3’는 2000-01시즌 52승 30패로 정규시즌을 마친 뒤 밀워키를 15년 만에 컨퍼런스 파이널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들은 2%가 부족했다. 알렌 아이버슨의 필라델피아 76ers에게 3승 4패로 무릎을 꿇은 후, 그들은 내리막을 걸었다. 2001-02시즌 이들은 41승 41패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로빈슨의 밀워키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조금 더 전열을 가다듬어서 재도전을 해봄직 했지만 밀워키는 로빈슨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로빈슨은 애틀랜타 호크스와 필라델피아에서 각각 한 시즌씩 보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득점력은 녹슬지 않았으나, 두 팀은 모두 로빈슨이 몸담았던 시즌에 각각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빅 3’의 밀워키보다 그에게 더 어울리는 조합은 없음이 확연히 드러난 것.

이윽고 로빈슨은 부상을 거듭했고, 그의 가치는 조금씩 하락했다. 급기야 2004-05시즌에는 부상으로 한 경기도 나서지 못하다 뉴올리언스 호네츠(現 펠리컨스)로 트레이드 됐고, 곧 바로 방출됐다. 한 달여간 소속팀 없이 지내던 로빈슨 시즌 종료직전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부름을 받았다. 정규시즌에 단 9경기만을 소화한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벤치멤버로 활약,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 그리고 11시즌의 NBA 생활을 마감했다.

★ 무엇이 아쉬웠나? 

로빈슨에게 아쉬웠던 점은 무엇일까. 바로 수비를 등한시 하는 마인드였다. 그는 자신의 공격력을 맹신했다. 그래서 실점하면 그만큼 득점으로 되갚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일관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지향적인 조지 칼 감독 밑에서는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감독들에게 로빈슨은 ‘고집 세고 수비에서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또한 다혈질적인 면이 있어 시합 도중 충돌도 잦은 편이었다. 

물론 자신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샌안토니오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 합류했고, 은퇴를 바라보던 그가 팀에서 큰 목소리를 낼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질을 죽이고 코칭스태프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했다. 데뷔 초부터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드림팀 3’에서 하차한 것도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초 로빈슨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미국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쟁쟁한 대선배들 사이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그에게 매우 큰 영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빈슨은 NBA 올스타에 한 번도 선정된 적 없었고, 소속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끈 적도 없었기에 다소 의외의 선택으로 보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우 불운하게도, 그는 대회 전 부상으로 하차하게 됐다. 게리 페이튼이 그를 대신하게 됐다. 만일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 초창기 시절 그의 곁에는 빈 베이커 외에 딱히 스타급 동료가 없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수준 높은 대선배들과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을 돌아보며 좀 더 성숙해지는 계기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비교적 이른 시기(만 32세)에 은퇴한 점도 아쉽다. 그렇기 때문에 통산 누적기록도 기대만큼 좋지 못했다. 또 득점력이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데뷔 시즌 10위에 이름을 올린 것 외에는 리그 득점 10권내에 랭크된 적이 없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의 아들 글렌 로빈슨 3세가 NBA 무대에 데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활약 중이다. 아버지만큼의 재능을 지닌 선수는 아니지만,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앞세워 NBA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2017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조용한 편이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그런 로빈슨 3세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느껴지곤 한다.

 

사진 제공 = Gettyimages/이매진스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