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최근 은퇴를 선언한 빈스 카터는 NBA에서만 22년을 뛰었다. 이는 리그 역사상 가장 긴 커리어 기록이다. 카터 이전까지 NBA 코트를 20년 이상 누빈 선수는 총 6명이 있었다. 보스턴 왕조의 핵심 멤버였던 로버트 패리시부터 댈러스 역대 최고의 스타 덕 노비츠키까지 그 면면도 화려하다. 지금부터 카터 이전의 NBA 20년 클럽 멤버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로버트 패리시(1976-1997)
소속 팀: 골든스테이트, 보스턴, 샬럿, 시카고

로버트 패리시는 1976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8순위로 골든스테이트에 지명되며 NBA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1996-1997시즌 시카고 불스 생활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패리시는 21년 동안 코트를 누볐다.

패리시의 커리어에 중요한 분기점이 된 시기는 1980년이었다. 1년 전 드래프트에서 래리 버드를 지명한 보스턴은 신인 드래프트를 앞두고 골든스테이트와 과감한 트레이드를 단행해 패리시를 영입했다. 동시에 골든스테이트로 건네 받은 지명권으로 케빈 맥해일을 지명하며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순식간에 다졌다.

초창기 패리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기에 기여하는 선수로 평가받았으나 데뷔 세 번째 시즌부터는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빅맨으로 자리잡았다. 보스턴 유니폼을 입은 1980년부터는 더더욱 승승장구했다.

훗날 패리시는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된 일을 두고 “내 커리어의 궤적을 바꿔놓은 사건”이라고까지 묘사했다. 당시 보스턴과 골든스테이트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격차가 큰 구단이었기 때문. 패리시는 “교도소에서 펜트하우스로 집을 옮긴 것과 다름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패리시는 14년 동안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3번의 우승을 경험했다.(1981, 1984, 1986) 스몰포워드 래리 버드, 파워포워드 케빈 맥해일과 센터 로버트 패리시가 구축한 ‘빅3’는 NBA 역사에 남을 프론트코트 트리오라는 평가도 받았다.

이후 샬럿에서 두 시즌을 보낸 패리시는 1996-1997시즌에 시카고에서 뛰면서 우승 반지를 한 번 더 거머쥐었다. 당시 패리시의 나이는 만 43세. 은퇴 직전에 차지한 이 우승으로 패리시는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나이에 우승을 경험한 NBA 선수가 됐다.

1997년 여름 은퇴를 선언하며 패리시는 21년 동안 이어져온 커리어를 마침내 마감했다. 보스턴에서 달았던 등번호 00번은 영구결번됐으며, 2003년에 패리시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케빈 윌리스(1984-2005)
소속 팀: 애틀랜타, 마이애미, 휴스턴, 토론토 등 8개 팀

213cm의 빅맨이었던 케빈 윌리스는 19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1순위로 애틀랜타에 지명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사실 윌리스가 지명된 1984년 드래프트에서는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조스탁턴 등 대단한 선수들이 배출됐는데, 안타깝게도 윌리스는 드래프트 동기들만큼의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던 선수였다.

그렇다고 해서 윌리스가 애매한 실력으로 오래 살아남았던 선수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전성기 시절 윌리스는 꾸준히 더블-더블의 시즌 평균을 기록했던 건실한 빅맨이었으며, 1991-1992시즌에는 18.3점 15.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NBA 서드 팀에도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1994년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된 후 윌리스는 트레이드와 FA 계약으로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이 되고 말았다. 이후 윌리스는 골든스테이트, 휴스턴, 토론토, 덴버, 샌안토니오, 댈러스에서 뛰었다. 커리어 동안 거쳐간 팀만 무려 8팀이었다. 트레이드로 윌리스를 영입한 후 곧바로 방출했던 밀워키까지 포함하면 무려 9개 팀이다.

다행히 윌리스는 은퇴 전에 우승을 맛볼 수 있었다. 2002-2003시즌에 샌안토니오에서 윌리스는 식스맨으로 평균 11.8분을 출전했고, 이 시즌에 샌안토니오가 우승을 거머쥐면서 윌리스도 우승 반지를 손에 끼웠다.

2006-2007시즌에 댈러스 소속으로 5경기를 뛴 것을 끝으로 윌리스는 코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윌리스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이전부터 진행해오던 의류 사업에 본격적으로 힘을 쏟았다. 은퇴 당시 윌리스의 나이는 만 44세였다.

 

케빈 가넷(1995-2016)
소속 팀: 미네소타, 보스턴, 브루클린

케빈 가넷은 1995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미네소타에 지명되며 NBA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미네소타로 돌아와 2016년 은퇴할 때까지 21시즌을 NBA에서 보냈다. 올스타에 15번, 올-NBA 팀에 9번 이름을 올렸다. 2004년에는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가넷은 샤킬 오닐, 팀 던컨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2000년대 대표 빅맨이었다.

특히 수비력이 대단했다. 가넷 올-디펜시브 팀에 총 12번 이름을 올렸는데 그 중 9번이 퍼스트 팀이었다. 보스턴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2007-2008시즌에는 올해의 수비수상도 받았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공수 활약을 통해 보스턴에 22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시즌이었다. 이 우승은 가넷 본인에겐 꿈에 그리던 생애 첫 우승이기도 했다.

NBA 선수로 뛰었던 21년 중 가넷이 가장 긴 시간을 보낸 팀은 미네소타다. 2007년 7대1 트레이드를 통해 보스턴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무려 13년을 미네소타에서 지냈다. 2015년 트레이드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미네소타에 복귀한 후에는 1년 반을 미네소타 선수로 뛰기도 했다. 14년 반을 미네소타 선수로 활약했던 것이다.

때문에 은퇴 후 가넷과 미네소타 구단의 사이가 다시 뒤틀어진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플립 손더스 전 감독의 사망 이후 미네소타 구단의 행보에 크게 실망한 가넷은 현재 미네소타 구단과 어떤 소통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가넷의 영구결번 문제로도 이어지고 있다. 가넷이 은퇴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음에도 미네소타는 가넷의 등번호 21번을 아직도 영구결번하지 못하고 있다. 가넷과 글렌 테일러 미네소타 구단주의 관계가 여전히 좋지 않고, 이로 인해 영구결번식을 열더라도 당사자인 가넷이 불참할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정작 가넷과 지금까지도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팀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반을 뛰었던 보스턴 셀틱스다. 보스턴은 최근 가넷이 달았던 등번호 5번을 2020-2021시즌 중에 영구결번할 계획이라고 공식 발표했고, 이에 가넷도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한 팀에서 14년 넘게 뛴 MVP 출신 에이스가 그 팀에서 영구결번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NBA를 통틀어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일임이 틀림없다. 1989년 창단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네소타 구단으로서는 당연히 아쉬운 일이다.

 

덕 노비츠키(1998-2019)
소속 팀: 댈러스

NBA 역사상 최고의 유럽 출신 선수는 누구일까? 언젠가 야니스 아데토쿤보나 루카 돈치치가 그 타이틀을 가져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주인공이 확실하다. 덕 노비츠키다.

‘독일병정’ 덕 노비츠키의 NBA 커리어는 1998년에 시작됐다.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9순위로 지명된 후 곧바로 댈러스로 트레이드됐다. 위대한 21년의 시작이었다.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스카우터들은 유럽 선수에 대한 정보가 늘 부족했고 유럽 선수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지금 같지 않던 시절이었다. 213cm의 큰 신장을 가졌지만 평범한 운동능력을 가진 백인 선수 노비츠키가 NBA에서 성공할 거라고 장담한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노비츠키는 빠르게 NBA에 정착했다. 기대에 많이 못 미쳤던 루키 시즌 이후 경기력이 급상승했다. 세 번째 시즌부터 평균 득점이 20점을 넘어섰으며 2001년에 올-NBA 서드 팀에 선정되며 NBA를 대표하는 파워포워드로 발돋움했다.

노비츠키의 성공으로 NBA에는 스트레치형 빅맨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슈팅거리가 긴 장신 선수가 가진 장점이 비로소 부각된 것이다. 여기에 노비츠키는 뛰어난 1대1 능력도 갖춘 선수였다. 90년대에 단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최악의 약체 팀이었던 댈러스는 덕 노비츠키의 활약과 마크 큐반 구단주의 적극적인 투자 속에 어느새 리그를 대표하는 강호로 거듭났다.

2006년 파이널에서 노비츠키는 생애 첫 우승을 아쉽게 놓쳤고, 2007년 플레이오프에서는 1위 댈러스의 충격적인 1라운드 탈락을 막지 못하며 큰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이후에도 노비츠키는 댈러스의 우승 도전을 이끌었고, 결국 2011년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가 이끄는 마이애미를 누르고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이후에도 노비츠키는 NBA에서 9년을 더 뛰었다. 노비츠키가 댈러스 유니폼을 벗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2019년 4월 9일에 열린 커리어 마지막 홈 경기에서 노비츠키는 30득점을 쏟아 부었다. 이날 댈러스의 홈 구장 아메리칸에어라인즈 센터에서는 래리 버드, 찰스 바클리, 숀 켐프, 스카티 피펜, 데틀리프 슈렘프가 직접 자리해 노비츠키의 은퇴를 축하했다. 다음날 샌안토니오 원정에서 열린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 노비츠키는 20점 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달성했다. 경기를 앞두고 숙적 샌안토니오 구단이 준비한 헌정 영상을 본 노비츠키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1년 동안 오직 댈러스에서만 뛰면서 노비츠키는 올스타에 14번 선정됐고 올-NBA 팀에도 12번 이름을 올렸다. 2007년에는 유럽 출신 선수로서는 최초로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통산 3만 1,560점을 기록한 노비츠키는 NBA 통산 득점 순위 6위에 올라 있기도 하다.

 

카림 압둘자바(1969-1989)
소속 팀: 밀워키, LA 레이커스

카림 압둘자바는 NBA 역대 최고의 센터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압둘자바는 NBA에서 6번의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정규시즌 MVP도 6차례 선정됐다. 올스타에는 19번 뽑혔는데 이는 지금까지 역대 1위 기록으로 남아 있다.(코비 18회, 르브론 16회)

통산 3만 8,387점을 쌓은 카림 압둘자바는 이 부문 역대 1위에도 올라 있다. 2위 칼 말론과의 격차가 1,459점에 달하고 3위에 올라 있는 현역 선수 르브론이 3만 4,087점이니 당분간은 1위 자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물론 르브론이 노쇠화의 여파를 최대한 줄이면서 꾸준히 커리어를 이어간다면 언젠가 압둘자바도 2위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196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밀워키에 지명된 압둘자바는 대학 시절부터 무척 유명한 전국구 스타였다. UCLA에서 뛴 3년 동안 팀을 모두 NCAA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빠짐없이 파이널 포 최우수선수상을 차지했다. 그런 압둘자바가 드래프트 1순위로 NBA에 입성한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압둘자바는 루키 시즌부터 리그 득점 2위(28.8점), 리바운드 3위(14.5리바운드)에 오르며 거물의 면모를 입증했다. 신인상은 당연히 압둘자바의 차지였다.

다음 시즌에 밀워키는 트레이드로 오스카 로버트슨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압둘자바는 득점 1위(31.7점)에 오르는 괴력을 과시하며 연일 맹활약을 펼쳤고 밀워키는 시즌 중에 20연승을 한 차례 달성하는 등 66승 16패로 시즌을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이 시즌에 밀워키는 파이널 우승도 달성한다. 압둘자바는 정규시즌 MVP와 파이널 MVP를 동시에 거머쥐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순식간에 자리잡았다.

1974년 압둘자바는 밀워키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이듬해 LA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었다. 압둘자바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다.

이후에도 꾸준히 리그 최고의 빅맨으로 활약한 압둘바자는 1980년에 매직 존슨이 레이커스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반지 수집을 시작한다. 이후 레이커스는 압둘자바와 존슨을 앞세워 8년 동안 5번 우승을 거머쥐며 부흥기를 열었다. 1987년과 1988년에는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88-1989시즌에 74경기를 뛴 것을 끝으로 압둘자바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만 42세였다.

압둘자바는 통산 득점 1위 외에도 출전 경기 2위(1,560경기), 출전 시간 1위(5만 7,446분), 야투 성공 1위(1만 5,837개), 야투 시도 1위(2만 8,307개), 블록슛 3위(3,189개), 리바운드 4위(17,440개)에  올라 있다. 20년 동안 코트를 누비며 압도적인 수준의 기록을 누적했다.

 

코비 브라이언트(1996-2016)
소속 팀: LA 레이커스

우승 횟수 역대 2위(16회), 파이널 진출 횟수 역대 1위(31회)에 빛나는 명문 구단 LA 레이커스. 대단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그간 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레이커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코비 브라이언트는 특별한 존재였다.

올스타 18회, 올-NBA 팀 15회, 올-디펜시브 팀 12회, 득점왕 2회, 정규시즌 MVP 1회, 파이널 MVP 2회 등등. 커리어 수상 경력을 나열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코비는 시대를 풍미한 2000년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코비는 역사적인 드래프트로 꼽히는 1996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됐다. 하지만 코비가 샬럿 유니폼을 입는 일은 없었다. 지명 직후 트레이드를 통해 LA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매직 존슨, 바이런 스캇 등을 동경하며 레이커스의 팬으로 성장했던 코비에겐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데뷔 팀이었다. 당시 코비의 나이는 만 17살이었다.

선배들에 밀려 루키 시즌에 평균 15.5분의 출전 시간을 기록하는 데 그쳤던 코비. 유타를 만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는 4개의 에어볼을 날리며 뜻하지 않았던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1997-1998시즌부터 코비의 기량은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고 이후 샤킬 오닐과 함께 레이커스의 리그 3연패를 이끌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2004년 샤킬 오닐이 트레이드된 이후 코비는 팀의 에이스이자 리더가 됐고 2009년과 2010년에 레이커스를 연속 우승으로 이끌며 마침내 1인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해냈다. 고독한 에이스였던 2006년에는 한 경기에서 81점을 쏟아 부으며 ‘Mr.81’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4년 12월 14일에 열린 미네소타전에서는 마이클 조던을 제치고 통산 득점 부문 역대 3위로 올라서기도 했다.(이후 코비의 기록을 르브론이 다시 깨면서 코비는 4위가 됐다.) 2016년 4월 13일에 열린 은퇴 경기에서는 막판 역전 위닝 슛을 포함해 60점을 쏟아 부으며 화려하게 코트를 떠났다. 이 경기로 코비는 NBA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에 60득점 이상을 기록한 선수로도 이름을 남겼다. 경기 후 코비는 마이크를 잡고 “맘바 아웃”을 외치며 오직 레이커스에서만 보낸 20년의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그의 나이 만 37세 234일이었다.

이후 코비는 레이커스에서 등번호 8번과 24번이 모두 영구결번됐다. NBA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2개의 등번호가 영구결번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영구결번 기준이 상대적으로 엄격한 레이커스에서 해낸 일이었기에 의미가 더욱 컸다. 그러나 지난 1월 26일 코비는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만 4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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