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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ketball Lifer' 제리 슬로언, 하늘의 별이 되다

기사승인 2020.05.23  1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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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편집부] 지금부터 여러분께 소개할 레전드는 그냥 '잘했던 감독'이 아니다. 한 경기, 한 경기 정성스럽게 전술을 짜고 끊임없이 연구했던 농구의 '거장'이었다. 마치 정글과도 같은 프로무대에서 그는 무려 23년이나 한 팀에 머물렀다. 그 팀에서 지도한 선수만 133명에 달한다. 수없이 많은 감독이 직업을 잃고 찾는 동안 그는 한결 같이 솔트레이크 시티에 머무르며 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동시에 세계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참고한 오펜스 시스템의 주인이 됐다. 바로 제리 슬로언이다. 

 

한국 시간으로 5월 22일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유타 프로스포츠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제리 슬로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파킨슨평과 치매를 앓고 있었던 슬로언은 결국 건강 악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사실 제리 슬로언은 감독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선수로서도 만만치 않은 경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시카고 불스가 배출한 최초의 스타였으며, 70년대 최고의 수비수였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그는 늘 한결같았다. 원칙에 충실했고, 늘 최선을 다했다. 혹자는 이런 그의 기질을 두고 '꼰대'라는 불경스러운 표현을 쓸 지 모르겠지만, 칼 말론, 존 스탁턴을 제외하면 특출한 스타가 없었던 유타가 늘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려왔던 것은 슬로언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슬로언이 있는 동안 유타는 15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이에 힘입어 슬로언은 마이클 조던과 함께 2009년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비록 여러 차례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미끄러졌지만, 명예의 전당이라는 더 큰 영광으로 보상받은 셈이었다.

슬로언이 사임을 발표하던 날, 데이비드 스턴 총재는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자신만큼이나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온 명장을 위한 예우였다.

"슬로언은 ‘Basketball Lifer’다. 20년 넘게 현역시절 이상의 열정을 바쳤다. 2번이나 파이널에 오르고, 1200승을 챙겼다. 이러한 열정은 그를 NBA에서 가장 훌륭하고 존경받는 지도자의 자리에 올려놨다. 그가 삶의 남은 챕터를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아내와 함께 이겨낸 시련 

1998년 6월, 유타는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승리를 거두고 화끈한 자축 파티를 벌였다. 2년 연속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선수들은 매우 들떠 있었다. 1997년 시카고 불스에 의해 우승이 좌절됐지만, 올해는 분명 기회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모두가 독기를 품고 시즌에 임했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승리는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슬로언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을 풀고 선수들과 즐겼다. 그리고는 아내 바비 슬로언의 손을 잡고 라커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바비 슬로언은 슬로언의 첫 아내였으며, 암 투병 끝에 2004년 사망했다)

바비 슬로언이 선수들의 라커룸에 들어간 것은 결혼하고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바비 슬로언은 당시 시카고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이 남자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농구에 관한한 가족들이 엮이길 결코 원치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나를 라커룸에 데리고 들어가고 구단 버스에도 태웠다"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슬로언은 아이들에게 훈련장을 구경시켜주지도 않았다. 많은 감독들이 자녀들에게 NBA가 어떤 곳인지 경험시켰던 것과 달리, 슬로언은 예외였던 것이다. 그는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으며, 그만큼 직장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던 슬로언이 아내에게 처음으로 라커룸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연은 이랬다. 1997년 NBA 파이널에서 패한 후 슬로언은 극심한 좌절을 겪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욕을 잃을 뻔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슬로언을 더 힘들게 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아내가 유방암에 걸린 것이다. 처음에 아내는 슬로언이 플레이오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슬로언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수술을 2주 앞둔 상태에서 치료가 심도있게 들어간 뒤였다. 

슬로언이 받은 충격은 컸다. 아내가 평소 하프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했을 정도로 강인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슬로언은 절망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를 일으켜준 이는 아내와 딸이었다. 담배와 술로 나날을 지새던 그에게 호통을 쳤다. "나도 이겨내는데 왜 당신이 못 일어나냐"고. 결국 슬로언은 그 길로 담배를 끊고 시즌에 집중했다. 하루에 무려 3갑이나 피우던 담배였다.

1998년 플레이오프가 진행되면서 아내의 건강도 많이 호전됐다. 슬로언은 "함께 이겨낸 시련"이라며 기뻐했다. 칼 말론과 존 스탁턴도 바비 슬로언을 향해 '행운의 여신'이라며 승리를 자축했다. 비록 파이널에서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슬로언에게는 잊지 못할 아내와의 추억이었다. 

 

슬로언의 러브스토리

사실 제리 슬로언에게 아내 바비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아내를 꼽을 정도다. 아내와 반평생 이상을 함께 했으며,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디비전 I 대학 진출도 포기했다.

슬로언은 4살 때 부친이 사고로 사망한 뒤 어렵게 자랐다. 그러나 특유의 영특함과 성실함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고등학생 때는 신입생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가 1957년. 슬로언은 신입생 회장이었던 바비에게 푹 빠졌다. 사실 바비는 처음에 슬로언에게 퇴짜를 놨다. 수줍음도 많이 탔고, 키도 그녀보다 작았다. 그러나 슬로언은 포기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다보니 어느새 키가 6피트 5인치까지 자랐다. 지극정성에 넘어간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슬로언과 약혼을 했고, 대학교 2학년 때 백년가약을 맺었다.

슬로언은 일리노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병에 걸려 5주 만에 자퇴, 디비전 II의 에반스빌 대학으로 팀을 옮겼다. 1부에서 탐내던 선수가 2부에 갔으니 상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1965년에는 29전 전승 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이끌었다. 밤에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중에서도 학업도 나쁘지 않은 성과를 얻었다. 그 노력은 프로 진출로 보상을 받았다. 슬로언의 전설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우수 수비수 슬로언

시카고 불스의 단장을 맡았던 제리 크라우스는 슬로언의 현역 시절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마이클 조던을 1대1 수비로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있냐고? 아마 제리 슬로언이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슬로언은 워싱턴 불리츠에 지명된 후 1년 만에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고향팀 시카고로 이적했다. 시카고는 당시 창단 팀이었지만 슬로언과 밥 러브, 쳇 워커, 놈 반 리어, 클리포드 레이 등의 활약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슬로언의 경우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지만 1968-1969시즌에는 밀워키 벅스를 상대로 43득점을 올리는 등 득점원으로서도 꽤 괜찮은 기량을 발휘했다. 특히 1973-1974시즌에는 54승 28패를 기록하면서 미드웨스트 디비전 2위에 올랐고, 서부 결승에도 진출했다.(아쉽게도 카림 압둘-자바의 밀워키 벅스에 의해 탈락의 아픔을 겪었다) 슬로언은 1974-1975시즌에도 우승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릭 베리가 이끄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의해 좌절한다. NBA 파이널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맞은 좌절이었다.

슬로언의 커리어는 1975-76시즌에 막을 내렸다. 경기 중 오른쪽 무릎 부상을 입으면서 예전과 같은 기동력을 잃었다. 마침 또 다른 핵심 쳇 워커도 은퇴하면서 오랫동안 계속된 5할+승률 행진도 막을 내렸다. 그 길로 슬로언은 은퇴했다. 그의 나이, 서른 셋에 내린 결정이었다.

10시즌간 그는 35.6분을 뛰면서 14.7득점 7.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는 4번이나 올라섰다. 비록 우승은 실패했지만, 시카고 불스 구단은 10년간 NBA 정상급 수비수로서 슬로언이 안긴 공로를 높이 사 그의 등번호 4번을 영구결번 시켰다. 

 

진정한 전설의 시작

그러나 슬로언의 진짜 전설은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은퇴 후 하부리그 팀 에반스빌의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고, 1979-80시즌에는 친정팀 시카고의 감독으로 올라섰다.

첫 시즌 성적은 30승 52패로 부진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45승 37패로 오랜만에 5할 승률을 거두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복귀시켰다. 그 시즌 시카고는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했으나,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래리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의 저력에 밀리면서 우승에 실패했다. 팬들은 '슬로언의 시카고'가 다음 시즌에는 한 단계 더 올라서주길 바랐다. 그러나 방만한 구단 운영에 팀은 한계에 봉착했다. 아티스 길모어와 레지 씨어스는 제 몫을 해줬지만 19승 32패로 부진하자 결국 로드 쏜 단장은 슬로언을 해고했다. '감독' 슬로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본 '해고 통보'였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시카고와의 결별은 슬로언을 운명 같은 만남으로 이끌었다. 바로 유타와의 만남이었다. 프랭크 레이든 감독은 슬로언을 전력분석원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슬로언은 어시스턴트 코치로 승진했고, 1988년에는 레이든의 뒤를 이어 감독직에 올라섰다. 그리고 2011년 2월 7일까지 슬로언은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픽앤롤 마스터

1999년 단축시즌을 앞두고 칼 말론은 구단주 래리 밀러와 만난 자리에서 쓴소리를 던졌다. 

"도대체 팀을 이끌 생각이 있는 겁니까?“

말론이 이렇게 흥분했던 이유는 슬로언 때문이었다. 1999시즌이 끝나면 유타는 말론, 스탁턴, 슬로언의 계약이 동시에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주변에서는 이때부터 유타가 '포스트 말론-스탁턴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말론은 아직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유타는 그렉 오스터택의 계약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안 말론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말론의 반응을 알게 된 래리 밀러는 곧바로 슬로언을 찾아가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유타 재즈의 감독을 할 수 있다.”

말론과 스탁턴은 래리 밀러 구단주의 결정에 지지를 보냈다. 특히 말론은 "슬로언은 우리 팀의 감독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과 시스템을 따른다. 내게 왜 그의 말에 복종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낚시할 때 왜 낚싯대를 써야 하는지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슬로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 배경에는 철옹성 같은 슬로언의 시스템이 있었다. 슬로언과 그의 단짝, 필 존슨이 고안한 유타식 플렉스 오펜스는 알고도 당하는 시스템이었다. 말론과 스탁턴이라는 견고한 핵심아래, 유타를 거치는 선수들은 모두가 오프 더 볼 무브와 스크린의 달인이 됐다. 대다수의 이미지에 스탁턴은 최고의 패서이자, 지휘관으로 남아있지만, 스탁턴 역시 가드 중 최고의 스크리너였다. 그가 활용한 픽앤롤은 세계적인 유행이 됐고, 그 외 1-4 오펜스, 박스 셋 등도 많은 지도자들이 응용했다. 대표적으로 2010-2011시즌에는 키스 스마트 감독이 슬로언의 플렉스 오펜스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주입했고, 탐 티보도 감독 역시 시카고 불스 오펜스에 유타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 농구는 시장이 작은 유타 프랜차이즈에 큰 도움이 됐다. 누구든 시스템에 적응만 하면 만사 O.K.였다. 덕분에 슬로언은 말론과 스탁턴이 팀을 떠난 후에도 팀을 재빨리 수습, 3시즌만에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노련함을 발휘했다. 데론 윌리엄스와 카를로스 부저는 말론과 스탁턴의 대를 잇는 새로운 픽앤롤 콤비로 거듭나기도 했다.

 

수많은 영광들 

사실 슬로언은 2003-04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하려고 했다. 당시 재즈는 42승 40패로 아깝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뒤였고, 슬로언 역시 올해의 감독상 경쟁에서 휴비 브라운에게 밀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은퇴 결심으로 내몬 것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아내였다. 바비 슬로언이 오랜 암 투병 끝에 사망한 것이다. 한동한 호전되는 듯 했던 바비의 건강은 이번엔 췌장암으로 다시 큰 위험에 빠졌다. 이에 슬로언은 모든 것을 그만두고 그녀의 간호를 하고자 했지만, 바비는 오히려 화를 내며 이를 만류했다.

이때 제리 슬로언이 감독직을 그만뒀다면 2006년 12월에 있었던 통산 1,000승의 영예도, 2008년 11월 7일에 있었던 '한 팀에서의 1,000승' 영예도 없었을 것이다. 슬로언은 한 팀에서 1,000승을 거둔 최초의 감독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샌안토니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을 제외하면 이 미션에 성공한 지도자는 없다.

또한 슬로언은 농구인생 동안 수많은 무명신화를 키워냈다. 마크 이튼은 1982년 4라운드 72순위로 지명된 선수였지만 4번이나 NBA에서 블록슛왕을 차지했다. 드래프트에서 아예 지명조차 받지 못했던 데이비드 베노아도 유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그렉 포스터는 1990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35순위로 유타에 오기 전까지 유럽의 2팀을 포함 7팀을 전전했으나 이후 주전으로 올라섰고, 1994년 드래프트의 하워드 아이즐리도 유타에서 주전으로 거듭났다.

1996년 드래프트의 샌든 앤더슨은 54순위로 지명된 선수였으나 파이널에서 맹활약했고, 1993년 드래프트 전체 45순위로 지명됐던 브라이언 러셀도 정상급 수비수로서 유타에서 커리어 시즌을 보냈다. 2006년 드래프트 47순위로 지명된 폴 밀샙도 유타에서 2라운드 신화를 쓴 후 애틀랜타, 덴버를 거치며 지금까지도 리그 정상급 포워드로 활약하고 있다.

이처럼 슬로언은 유타 프랜차이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농구인이었다. 그런 슬로언이었기에 2011년에 있었던 갑작스러운 사임은 리그에 큰 충격을 줬다. 

다행히도 이후에도 슬로언은 유타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2013년에 유타는 슬로언에게 구단 고문직과 스카우팅 컨설턴트를 맡긴다. 또한 2014년 1월 유타 구단은 ‘1223’이라는 숫자를 홈 경기장 천장에 걸어 슬로언의 업적을 기렸다. 1223은 슬로언이 유타에서 보낸 23년 동안 기록한 승수였다.

슬로언이 유타의 지휘봉을 내려놓은 날 새크라멘토 킹스의 제리 레이놀즈 단장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레이놀드 단장의 말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공격 시스템, 스페이싱, 스크린, 볼과 선수들의 움직임까지 모두. 스탁턴이 백 스크린을 걸어주고 선수들은 최고의 스팟을 찾아 움직였다. 너무나 보기 즐거웠다. 슬로언이 떠난 지금부터 NBA에서 그런 농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진 제공 = 로이터/뉴스1

 

이동환 기자 ldh2305@rookie.co.kr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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