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지난 20일 서울 세종대로에 위치한 컨퍼런스하우스 달개비에서는 여자농구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이사회가 열렸다. 드래프트나 샐러리캡 등 여러 안건들이 논의됐으나, 그중 가장 놀랄 만한 소식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사상 최초 리그 조기 종료, 두 번째는 FA 제도의 변화였다. 

여자농구연맹은 "보상FA의 권익 보호와 구단의 균형 발전을 위해 2차 보상FA 자격 취득 대상자부터 원소속 구단과의 우선 협상을 폐지하고 모든 구단과 협상토록 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고액 FA 선수들의 발목을 잡아왔던 족쇄를 끊어낸 것이다. 

소식이 들리자 WKBL 6개 구단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 30일 본지 확인 결과, 현재 박혜진의 원 소속 구단인 아산 우리은행을 포함해 KB, 하나은행, 신한은행, BNK, 삼성생명 등 6개 구단 모두가 박혜진을 노리고 있는 상황.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박혜진 영입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 팀이 이상한 것이고, 박혜진의 가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박혜진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일까? 또 우리은행이 아닌 다른 팀이 박혜진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은행
코트 안팎으로 대체 불가 자원이다.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2010년대 왕조의 서막이었던 첫 우승부터 통합 6연패, 위성우 감독의 200승, 임영희 코치의 600경기 그 모든 역사에는 박혜진이 있었다. 위성우 감독 부임 후 그의 작전판에 임영희, 양지희, 김정은이 자리를 비운 적은 있어도 박혜진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위 감독이 지휘한 8시즌 동안 우리은행은 272경기에서 36명의 국내 선수가 나와 13,481점을 기록했는데, 그중 3,345점이 박혜진의 몫이었다. 전체 득점의 무려 24.8%다.

또 무엇보다도 우리은행은 우승을 노리는 팀이다. 우리은행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1번을 빼고 모두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우리은행이 박혜진을 보내는 순간, 우리은행은 박혜진이 빠진 만큼 약해지고, 상대는 그만큼 강해진다. 여자농구는 국내 프로리그 중 가장 팀의 숫자가 적은 리그다. 팀별로 한 시즌 최소 6번을 맞붙는다. 부메랑이 6번이나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KB
청주 KB스타즈는 앞서 말한 그 부메랑을 가장 위협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구단이다. 본격적으로 2강 구도를 형성한 17-18시즌부터 올 시즌까지 KB와 우리은행의 정규리그 맞대결 성적은 총 19번을 붙어 11승 8패로 오히려 KB가 앞섰다. 그런 가운데 라이벌 우리은행의 박혜진을 데려온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바르셀로나에서 메시를 영입하는 셈이다.

아울러 KB가 만약 외부 FA로 전력 강화를 노린다면 이번 봄만한 영입 적기가 없다. 

첫 번째로 샐러리캡. KB는 지난 시즌 샐러리캡 12억 원 중 12억을 모두 소진했다. 샐러리캡 소진율 100%를 기록한 유일한 WKBL 팀이었다. 그런데 올 시즌, WKBL은 샐러리캡을 기존 12억 원에서 14억 원으로 늘린다고 발표했다. 뻑뻑했던 장부에 2억의 숨통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 보호 선수다. 올 시즌 공헌도 1위 박혜진을 영입하는 팀은 보호 선수 4명을 제외한 1명 또는 계약 금액의 300%를 보상해야 한다. 그런데 KB는 이번 시장에서 다음 시즌 팀의 주축이 될 신인왕 허예은을 자동으로 묶을 수 있다. WKBL은 규정을 통해 당해 지명한 신입선수를 자동 보호 대상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하나은행
부천 하나은행은 국내 모든 프로 농구단 중 가장 플레이오프가 절실한 팀이다. 2012년 하나은행(당시 하나외환)의 이름을 걸고 출발한 이후 한 번도 플레이오프 공식 기록이 없기 때문. 올 시즌도 우여곡절 끝에 플레이오프권인 3위로 정규리그를 마쳤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플레이오프가 취소되는 바람에 하나은행의 봄농구 실패 기록은 또 해를 이어가게 됐다.

만약 하나은행이 앞으로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면, 당연히 박혜진을 영입해야 한다. 

박혜진은 챔피언 결정전에만 20경기를 뛰었다. 20경기에 나와 18승(2패) 272득점을 기록했는데, 출전 경기와 승리, 득점 모두 현역 1위다. 특히 득점은 2위 김단비(194점)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아득히 앞서 있다. 평균 기록도 13.6점 6.0리바운드 4.3어시스트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이다.

아울러 하나은행은 16-17시즌부터 우리은행에 26연패를 기록 중이다. 박혜진은 이 26경기에서 경기당 15.4점을 기록하며 하나은행을 괴롭혔는데, 26경기를 뛰면서도 무려 43.3% 3점슛 성공률을 유지했다. 하나은행에게 박혜진은 그야말로 저승사자였던 셈. 우리은행을 제외한 5개 구단 중 박혜진의 존재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구단은 아마 하나은행일 것이다.

 

신한은행
가드는 상대로부터 우리 공을 지키는(guard) 역할의 포지션이다. 그런데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가드진은 올 시즌 그렇지 못했다. 신한은행의 1번 자리는 시즌 끝까지 정상일 감독의 속을 썩였다. 

신한은행은 올 시즌 경기당 14.2개의 실책을 범했다. 1위 우리은행(11.2개)과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꼴찌였다. 

포인트가드로 쓰기 위해 FA로 영입한 김이슬은 풀타임을 뛰어 보니 1번보다는 오히려 2번에 어울리는 재목이었다. 김이슬이 볼 운반 능력이 불안하고, 압박 수비에 약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구단들은 김이슬이 공을 잡을 때마다 프레스를 걸어 그를 괴롭혔다. 실책에 진저리가 난 정 감독은 신인드래프트에서 일말의 고민 없이 가드 애나 킴을 지명했지만, 애나 킴은 데뷔전에서 불운한 부상으로 쓰러졌다. 

박혜진은 그런 면에서 신한은행에 꼭 필요한 선수다. 데뷔 후 401경기에서 평균 35분 5초를 뛰면서 경기당 실책이 1.7개밖에 안 된다. 올 시즌은 1.6개로 더 줄었다. 게다가 1번과 2번을 오가며 스스로 플레이메이킹이 가능하다. 올 시즌 신한은행은 리그에서 24초 바이얼레이션에 가장 많이 걸린 팀이었다. 박혜진의 가세는 이를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

 

BNK
지난 10월 23일, 부산 BNK 썸의 홈 개막전이 부산에서 열렸다. 최초의 부산 연고 여자농구팀의 탄생에 무려 5천 3백명이 넘는 부산 시민이 걸음했다. 많은 인파가 모인 만큼, 형형색색의 피켓과 플래카드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중 인상 깊은 플래카드 한 장. 

‘강아정 선수의 고향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부산 팬들이 동주여고 출신의 강아정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한 문구였다. 강아정은 이날 BNK의 상대팀이었던 KB의 프랜차이즈 스타임에도 이런 환호를 보낼 정도로 부산은 지역구 스타에 대한 애착이 큰 도시다. 

그러나 현재 BNK 로스터에 부산 출신 선수는 안혜지 단 한 명뿐이다. 그런 점에서 박혜진의 영입은 BNK의 지역 밀착 사업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 부산시 서구에서 난 박혜진은 부산 대신초와 동주여중을 졸업했다. 데뷔 후 줄곧 우리은행에서 뛰었지만, 본가는 여전히 부산에 있어 비시즌에는 항상 부산에서 휴식을 취한다. 

올 시즌 캘리포니아 출신의 카와이 레너드를 영입하면서 성적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NBA의 LA 클리퍼스는 BNK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

 

삼성생명
19-20시즌의 시작은 호기로웠다. 개막전에서 대어 우리은행을 잡으며 올 시즌을 기대케 했다.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던 지난 시즌보다 더 높은 곳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삼성생명은 9승 18패 창단 첫 꼴찌로 시즌을 마감했다.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이 삼성생명의 원대한 꿈을 가로막았다. 삼성생명은 올 시즌 27경기 중 5경기를 외국인 선수 없이 치렀다. 박하나-배혜윤-김한별로 이어지는 국내 선수 트로이카는 정상 가동된 경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특히 앞선에 박하나의 공백이 아쉬웠다. 우리는 건강한 박하나의 위력을 지난 시즌(15.1득점) 확인했다. 그러나 박하나는 올 시즌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단 11경기밖에 못 나왔다. 그마저도 출전한 경기에서 7.1점 야투율 31%로 부진했다. 그 외 김한별과 배혜윤도 최근 3시즌간 전 경기를 소화한 이력이 없다. 

박혜진은 리그 최고의 철강왕이다. 최근 8시즌 중 올 시즌을 포함해 18-19시즌(33경기)을 제외하고 무려 7시즌을 전 경기 출전했다. 이 기간 평균 출전 시간은 36분 23초에 달했다. 개근하는 에이스를 원하는 삼성생명에게 박혜진은 꼭 맞는 옷이 될 수 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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