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리그가 지난 9일 일시 중단을 발표하고, 중단 기간인 열흘 동안 그 누구보다 목표의식이 뚜렷했던 팀은 청주 KB스타즈였다. 2000년대 신한은행, 2010년대 우리은행과 같은 왕조를 세우기 위한 초석, 백투백 우승은 KB 코치진 및 선수단에게 너무나 간절했다. 비록 정규리그 우승은 어려워졌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회하겠다는 일념 하에 천안 훈련장에서 매일 같이 구슬땀을 흘렸던 그들에게 20일 전해진 잔여 일정 취소 소식은 너무도 가혹했다. 코치진은 말을 잇지 못 했고 어떤 선수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챔피언 우리은행을 제외하고 2위가 아쉬운 WKBL의 유일한 구단, 청주 KB스타즈다.

워리 

우리은행을 다른 시중은행에서 부를 때 ‘워리은행’이라고 한다. 일인칭 복수형 대명사 ‘우리’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다. 은행도 그렇고 농구단도 그렇다. WKBL 5개 팀 구단은 모두 우리은행을 ‘워리’라고 한다. 걱정을 뜻하는 ‘워리(worry)’와 동음이다.

KB에게 라이벌 우리은행은 지난 몇 년간 걱정 그 자체였다. 비록 지난 시즌 챔피언은 KB의 몫이었지만, 또 지난 시즌 정규리그 맞대결에서는 끝내 우위를 점하긴 했지만, 또 선수 임영희가 코치 임영희가 되면서 전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은행은 비시즌 내내 KB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그리고 2019년 10월, 시즌이 개막하자 그 걱정은 현실이 됐다. 사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KB는 신한은행-BNK-삼성생명을 차례대로 꺾으며 개막 3연승을 내달렸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맞이한 우리은행과 시즌 첫 번째 맞대결, KB는 1쿼터 시작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 0-10 리드를 내줬다. 이후 박지수의 분전으로 경기 중반 다시 팽팽한 분위기를 만들긴 했지만, 결국 경기는 65-89로 대패했다. 

KB는 강팀이었다. 우리은행 전 패배 이후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 다른 팀을 상대로 3연승을 올리며 다시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KB의 연승은 또 우리은행을 만나 깨졌다. 염윤아가 분전했지만, 이번에는 박지수의 컨디션이 안 좋았다. KB는 개막 후 14경기에서 10승 4패를 기록했는데, 4패 중 3번이 우리은행 전이었다. 

이후 맞대결에서는 2연승을 거두며 만회했으나, 사실상 결승전이었던 6라운드 맞대결에서 종료 직전 다 잡은 승리를 내주며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경기 전까지 우리은행에 0.5경기 차 앞선 1위였던 KB는 이날 패배로 선두를 내줬다. 그리고 리그는 중단됐고, 결국 종료됐다. 코로나19가 세상에서 가장 야속했던 농구단, KB스타즈였다.

 

에이스

KB는 박지수의 팀이다. 우리은행이 박혜진의 팀이고, 하나은행이 강이슬의 팀이고, 신한은행이 김단비의 팀인 것처럼 KB 역시 박지수의 팀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 어느 팀도 KB만큼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팀은 없다. 박지수는 올 시즌 13.8점 11.0리바운드 4.3어시스트 1.4스틸 2.3블록슛을 기록했다. 국내 선수 기준 팀 내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심지어 굿디펜스까지 모두 1위다. 모든 공격은 박지수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수비는 박지수에서 끝난다. KB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팀이든 박지수를 갖고 있는 팀은 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박지수가 쓰러졌다. 지난 2019년 12월 13일의 일이다. 대표팀에 다녀온 박지수가 우측 둔부와 대퇴부 사이 근육 파열로 프로 데뷔 후 커리어 첫 장기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전까지 박지수는 데뷔 시즌을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서 뛴 2017-2018시즌부터 매 시즌 전 경기 출장했다. 바꿔 말해 이 부상 전까지 최근 세 시즌간 KB는 박지수 없이 경기를 치러본 적이 없다.

결론적으로 KB는 박지수 없이 6경기를 뛰었고 이 기간 3승 3패를 기록했다. 훗날 우리은행에게 정규리그 우승을 아쉽게 내주는 바람에 이 때 3패가 뼈아프게 보이긴 하지만, 사실 3승 3패를 기록할 때만 하더라도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KB가 선방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단순히 5할 승률을 기록한 게 선방이라는 뜻이 아니다. 박지수 없이 농구를 해본 적이 없는 KB와 안덕수 감독이 이 기간,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KB with 박지수 / 10G 73.4점 37.0리바운드 3PM 6.6개 3P% 28.3%
KB without 박지수 / 6G 66.8점 31.0리바운드 3PM 9.2개 3P% 37.4%

박지수가 부상으로 이탈하기 전까지 KB는 10경기에서 경기당 37.0리바운드에 6.6개 3점슛을 28.3%로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지수가 없었던 6경기에서 KB는 리바운드가 31.0개로 줄어든 대신 무려 경기당 9.2개 3점슛을 37.4% 성공률로 넣었다. 지난 시즌 3점슛 성공(6.3개)과 시도(19.4개) 모두 리그 최하위권이었던 KB가 박지수가 없는 동안 지난 몇 년간 익숙했던 ‘양궁 농구’의 기억을 되살리며 새로운 득점 루트를 창출한 것이다. 

박지수 없이도 승리하는 법을 터득한 KB 벤치는 박지수 의존증을 조금씩 떨쳐냈다. 이전 10경기에서 평균 33분 36초를 소화한 박지수는 부상 복귀 후 11경기에서 31분 36초로 출전 시간이 크게 줄었다. 시즌 평균 출전 시간은 32분 33초. 최근 3년간 가장 적었다.

 

양궁부대 재소집

비록 염원했던 V2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KB의 올 시즌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박지수, 강아정, 염윤아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암초였을 뿐, KB는 확실히 지난 시즌보다 다양해진 득점 루트로 상대를 어렵게 했다. 

그중 하나가 3점슛이다. KB의 지난 시즌 3점슛 성공 개수는 경기당 6.3개로 리그 4위였다. 그러나 올 시즌 KB는 경기당 7.3개 3점슛을 성공하며 이 부문 리그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7.3개 3점슛은 단일리그가 시작된 2007-2008시즌 이후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1위 13-14시즌 KB 7.6개)이다. 

양궁 농구의 부활에는 강아정이 중심에 있었다. 시즌 막판 발목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평균 기록이 깎이긴 했지만, 강아정은 올 시즌 리그에서 강이슬 다음으로 많은 평균 2.2개 3점슛을 기록했다. 성공률은 32%.

심성영과 최희진도 각각 1.7개, 1.2개 3점슛을 35%, 38%로 성공하며 좋은 시즌을 보냈다. 심성영의 경우 FA를 앞두고 득점(9.6점), 어시스트(3.3개), 야투율(40%) 등 여러 부문에서 커리어하이를 세우며 자신의 몸값을 키웠다. FA로 이적해 첫 시즌을 보낸 최희진 역시 5.4점으로 데뷔 후 두 번째로 높은 평균 득점을 기록했다. 3점슛 성공률(37%)과 2점슛 성공률(52%) 모두 수준급이었다. 

그 외 김민정도 지난 시즌 21%에서 29%로 성공률을 끌어올렸고, 신예 허예은도 29% 성공률을 기록하며 활시위에 힘을 보탰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기록은 바로 국보 센터 박지수의 외곽슛 기록. 박지수는 지난 1월 18일, 하나은행과 홈 경기에서 자신의 정규리그 첫 3점슛을 성공했다. 이후 박지수는 2개의 3점슛을 더 추가하며 올 시즌 총 3개(3/9)의 3점슛을 성공, 성공률 33.3%로 시즌을 마쳤다. 198cm 센터가 3점슛까지 던진다? 박지수가 내년에도 이처럼 쏠쏠한 슛감을 선보인다면, 상대 팀은 외곽에서부터 박지수에게 더블팀을 붙어야 할지도 모른다.

 

미니

KB의 다음 시즌이 더욱더 기대되는 이유, 바로 신예 허예은의 존재다. KB는 지난 1월 열린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4.8%의 기적으로 1순위 지명권을 획득, 허예은을 품에 안았다. KB가 드래프트 전부터 허예은을 노린 것은 공공연한 사실. 이미 비시즌부터 허예은을 데려오기 위해 신한은행으로부터 지명권을 트레이드해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성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것일까? KB는 어쨌든 그토록 바라던 허예은을 뽑았다. 키는 165.2cm로 크지 않지만, 시야와 볼 핸들링, 패스는 이미 프로 레벨에 가까웠던 허예은은 올 시즌 9경기에 나서 경기당 10분 52초를 뛰면서 3.3점 1.0리바운드 1.6어시스트로 시즌을 마쳤다. 기존 가드 자리에 염윤아, 심성영, 김현아 등 여러 자원이 있던 탓에 제한된 시간을 소화했지만, 22분 8초를 뛴 신한은행전에서는 야투율 100%와 더불어 9점 2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타고난 재능을 증명하기도 했다. 

허예은을 ‘미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카일라 쏜튼은 “미니는 정말 좋은 가드다. 볼 핸들링도 좋고, 공도 잘 뿌린다. 감독님도 항상 미니가 볼을 잡고 있을 땐 그녀에게 눈을 떼지 말라고 한다. 언제 어떤 패스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니는 루키지만, 우리가 잘 맞춰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3.3득점 1.6어시스트는 분명 그의 기대치에 걸맞은 성적은 아니다. 1년 전 1순위 박지현은 데뷔 시즌 8.4점 5.6리바운드 3.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 선배 박지수는 데뷔 첫해 10.4점 10.3리바운드로 더블-더블 시즌을 보냈다. 

안덕수 감독은 시즌 도중 허예은에 대해 “수비 이해도는 아직 부족하다. 로테이션이나 헬프 타이밍이 보완이 필요하다. 웨이트도 보강해야 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안 감독은 이미 허예은을 길게 보고 있다. 더군다나 코트 위에서 팀을 진두지휘하는 포인트가드는 원래 적응에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포지션이다. 미니의 가치는 여름을 돌아 다가오는 시즌에 더욱더 빛날지도 모른다. 

팀 MVP | 박지수

WNBA와 국제 대회를 모두 소화하고도 리그에서 변함없는 지배력을 선보였다.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모두 팀 내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198cm의 그는 이제 3점슛까지 자유자재로 쏜다.  시즌 막판 허리 부상으로 고생했다는 점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리그 조기 종료는 길게 봤을 때 오히려 박지수와 KB에게 호재일 수도 있다. 

팀 RISING STAR | 허예은

기록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올 시즌 KB의 농구를 본 이들이라면 알고 있다. 허예은의 플레이는 분명 보는 사람을 기대하게 한다. 경기 중 화려한 노룩 패스에 감탄한 아나운서가 경기 후 노룩 패스에 대해 묻자 “제가 언제 했죠?”라고 답했던 새내기. 그의 패스는 계획된 움직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센스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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