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박상혁 기자] 원주 DB의 수석코치인 이효상 코치는 아마농구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낙생고를 시작으로 아마 무대에서 오랜 기간 지도자 경험을 했고 특히 한때 위기에 몰렸던 용산고에 취임해 공격적인 스카우트와 스파르타식 훈련을 접목해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DB에서 뛰고 있는 김태홍과 정희원 등이 모두 당시 가르침을 받았던 그의 제자들이다. 이후 고려대 코치를 거친 그는 지난 시즌부터 DB의 수석코치로 부임해 프로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뒤로 하고 올 시즌 6강 플레이오프 진입을 위해 선수들과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농구 인생을 들었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달리기를 잘해 시작한 농구, 잊을 수 없는 용산고 시절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난 키가 작았다. 이런 내가 농구선수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당시 내가 다니던 대방초등학교에 운동부가 농구부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축구부가 있었다면 나는 축구선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4학년에 처음 농구를 하게 됐는데 키가 작은 대신 달리기를 매번 1등할 정도로 스피드가 빨라서 할 수 있었다. 당시 같이 농구를 시작한 동기가 김승기 현 KGC인삼공사 감독이다. 

6학년 때까지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했다. 그냥 형들을 쫓아다니는 거였다. 라면 봉지에 쌀을 담아 갖고 가서 합숙하고 그럴 때였으니까. 그래도 6학년 때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했고 연계 학교인 용산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중학교에 가서도 바로 게임을 뛸 수는 없었다. 키가 엄청 크거나 후배 김병철(오리온 코치)처럼 실력이 뛰어나거나 하지 않으면 코트를 밟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용산고로 진학을 했는데 1학년 때만 해도 성적이 좋지는 않았다. 고1 때만 해도 이상범 감독님이 계신 대전고가 잘할 때였다. 이러다가 내가 3학년이 되면서 용산고도 멤버가 갖춰졌다. 우리 학년에 나, 김승기, 김재훈(전 현대모비스 코치)이 있었고 2학년에 양경민, 1학년에 김병철이 오면서 선수 구성이 업그레이드 됐다. 이상민(삼성 감독)이 있던 홍대부고에 한 번 진 것을 빼고는 웬만하면 다 이겼던 것 같다. 

용산고 시절에는 운동을 정말 강하게 했다. 당시 감독이던 양문의 선생님의 ‘수비 체력은 기본’이라는 지론 때문에 거의 매일 남산을 뛰었다. 용산고 출신이라면 모두 고개를 절로 젓는 ‘남산 로드워크’인데 남산 길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것도 문제였다.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감독님이 한 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지켜보다 아니다 싶으면 양문의 선생님이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 선수들을 독려(?)하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여기에 농구부는 머리도 엄청 짧게 깎아야 했다. 일반 학생도 짧았지만 농구부는 더 짧았다. 이것 역시 양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경기에서 지거나 사고를 쳤다 하면 바로 빡빡 깎아야 했다. 만약 모자를 쓰다가 걸리면 더 죽었다. 대신 이기면 조금은 긴 스포츠형까지 봐 주셨다. 깎는 것도 지금처럼 바리깡 기계가 아닌 손으로 움직이며 깎는 바리깡으로 깎았는데 잘못 깎다 머리에 생채기도 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살기 위해 경기를 죽어라 뛰었던 것 같다.   

운동이 너무 힘들다보니 남들 가는 소풍(?)도 몇 번 다녀왔다. 한번은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힘들어서 운동은 너무 하기 싫고 그래서 애들과 같이 도망갔다. 그나마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간 게 경기도 부천이었는데 그래도 좋았다. 뒷일 걱정보다는 일단 혼나지 않고 힘든 농구를 안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부천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사 먹고 놀다 보니 모았던 돈이 어느새 떨어졌다. 그래서 각자 아는 지인한테 연락을 해 돈을 마련하려다가 부모님들 귀에 들어갔다. 연락을 받은 부모님들이 어느새 부천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소풍 나간 당일 저녁에 부모님들에게 잡혀서 숙소에 복귀했고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겠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진 고려대 진학과 삼성 입단

정말 고등학교 시절은 운동한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히려 대학 진학에 있어 연고대를 가고 싶지 않았다. 명문교이긴 하지만 그만큼 운동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야 밝히지만 나는 사실 다른 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리고 고려대가 아닌 다른 대학을 갔더라면 선수 생활을 조금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이런 내 생각과 달리 부모님은 자식을 연고대 중에 한 곳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두 학교는 나를 원치 않았고 성균관대나 한양대에서 나에 대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정리하면 ‘나를 오라는 곳에 가지 않고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곳’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의 간곡한 부탁에 양문의 선생께서 여러 방면으로 힘을 쓰신 것인데 그러다보니 내 대학 진학은 마지막까지 지지부진하다 정말 거의 끝 무렵에 결정이 됐다. 

내가 갓 입학했을 때만 해도 고려대 농구부는 암울할 때였다. 4학년 선배가 김상식 국가대표팀 감독이었고 정한신, 정인교, 윤호영 등의 형들이 주전으로 뛸 때였다. 나 역시 1,2학년 때 많이 뛰었지만 6년간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한 번도 못 이기면서 정기전만 끝나면 생각이 많아지던 때였다. 그러다 김병철과 전희철 등이 오기 시작하면서 정기전에서도 이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가드 포지션의 (김)병철이가 오면서 나는 4학년이지만 백업으로 밀려나야 했다. 그러다 졸업 후 실업팀을 결정해야 했는데 나는 내심 현대를 가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현대는 입단 TO가 끝났다고 했다. 다른 말로 삼성에 가라는 이야긴데 왠지 가기 싫었지만 그래도 입단을 하게 됐다. 

당시 동기가 김승기, 문경은(SK 감독) 등이었는데 처음 모인 뒤 몇 차례 훈련을 할 때마다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있는 듯 없는 듯 했다. 사실상 농구도 잘하지 못하는 나를 그렇게 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고민을 하다가 먼저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은퇴 후 회사로 들어가려던 오세웅, 김대의(성성중 코치), 서대성(동국대 감독) 같은 선배들과 같이 회사에서 교육을 받았다. 삼성그룹 신입사원 교육 8개월을 꼬박 다 받은 뒤 영업본부 서울지사 발령을 받았다. 그때는 휴대폰이 나온 지 얼마 안됐고 세탁기나 TV 같은 가전이 잘 나갈 때 였는데 나름 영업력을 발휘해 인정도 받았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 이현수 기자, KBL 제공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