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승기 기자] 매년 6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신인 드래프트는 1년 중 농구 팬들을 가장 설레게 하는 이벤트 중 하나다. 어떤 신인을 뽑느냐에 따라 10년 농사가 좌우되곤 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신인이 대활약하며 구단과 팬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를 ‘스틸픽(Steal Pick)’이라 한다. 스틸픽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고, NBA 역사상 최고의 스틸픽 사례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본 기사는 루키더바스켓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스틸픽’이란?

영어로는 ‘Steal Pick’이라고 쓴다. 먼저 스틸픽의 정의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스포츠계에서 통용되는 표현으로, 상당히 다양한 사례에서 널리 쓰인다. 사람마다 평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스틸픽으로 칭해야 할지 그 기준이 상당히 모호하기도 하다. 일반적인 네 가지 기준에 따라 스틸픽 사례를 분류해보았다.

1) 기대감이 낮았던 선수가 스타로 성장하는 경우

NBA 드래프트의 1순위부터 14순위까지를 ‘로터리 픽(Lottery Pick)’이라고 부른다. 플레이오프에 탈락한 14팀이 추첨을 통해 지명 순서를 정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드래프트 상위 지명자들은 그만큼 리그에서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 받기 때문에 일찍 지명되는 것이다. 특히 1순위부터 5순위 안에 지명되는 선수들은 특급 유망주로 분류된다. 수많은 스카우터들의 분석과 워크아웃 결과가 드래프트 순위에 반영된다.

현행 NBA 드래프트는 60순위까지 뽑는다. 1순위 지명자가 60순위 지명자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리그 내 많은 팀들은 2라운드 지명(전체 31위부터 60순위)자들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보험성 지명 혹은 트레이드 자원으로 뽑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2라운드 지명자 중 성공하는 케이스가 매우 드물다. 잘하는 선수들은 이미 1라운드에서, 더 심하면 로터리픽으로 다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스타로 성장하는 선수들이 등장하곤 한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 뚫고 나온다고 했던가. 드래프트 당시만 하더라도 전혀 기대를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리그에서 살아남는 선수들이 있다.

2003 드래프트 당시 카일 코버는 리그에서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평가 받았다. 약한 수비력과 형편없는 운동능력 등 슛 외에는 NBA 수준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코버는 2003 드래프트 전체 51순위로 지명됐다. 하지만 한때 올스타전 무대를 밟았고, 대부분의 동기들이 자취를 감춘 현재까지도 주요 롤플레이어로서 장수하고 있다.

2017 드래프트에서는 카일 쿠즈마가 이런 케이스다. 그는 NBA 무대에서의 성공 가능성에 의문부호가 붙는 선수였다. 대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슈팅력이 부정확했고, NBA에서는 트위너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유형이었기 때문이었다. 1라운드 27순위가 되어서야 호명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그런데 2017-18시즌이 끝난 지금 그는 최고의 신예스타 중 한 명으로 각광 받고 있다. 올-루키 퍼스트팀 선정은 덤.

이러한 케이스들은 애초에 기대감이 낮았기 때문에 드래프트 순위 자체도 낮은 경우가 많다. 아래 후술할 2011 드래프트 60위 아이재아 토마스, 2006 드래프트 47순위 폴 밀샙 등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자 출신 스타들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2) 예상 순위보다 밀린 선수를 낚은 경우

잠시 1998 드래프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캔자스 대학 출신의 폴 피어스는 누가 뭐래도 해당년도 최대어 Top 3 안에 꼽히는 실력자이자 대형 유망주였다. 그는 1997-98시즌 NCAA 올-아메리칸 퍼스트팀에 만장일치로 선정되는 등 전미 최고의 스윙맨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프트 당일 폴 피어스의 이름은 10번째로 불렸다. 마이클 올라워캔디, 리프 라프렌츠, 로버트 트레일러 등이 더 먼저 단상에 올랐다. 이에 자존심이 잔뜩 상한 피어스는 “나를 지나친 9팀을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인터뷰하며 패기 넘치게 출사표를 던졌다. 당시 피어스를 10순위로 지명할 수 있었던 보스턴 셀틱스만 횡재한 셈이었다. 

이처럼 실력 혹은 명성, 당초 예상에 비해 낮은 순위로 지명된 경우도 스틸픽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스틸픽이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소속팀의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다. 즉, 보스턴 구단의 입장에서 스틸픽이라는 얘기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른 팀들이 먼저 지명하지 않아 운 좋게 훌륭한 선수를 얻게 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2012 드래프트 1라운드 9순위로 지명된 안드레 드러먼드도 비슷한 경우다. 고교시절 전미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던 드러먼드는 코네티컷 대학 진학 후 대단히 실망스러운 한 해를 보냈다. 이 때문에 주가가 많이 내려갔고, 9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게 기회가 왔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그는 현 리그 최고의 빅맨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2017 드래프트에서는 데니스 스미스 주니어가 그랬다. 당초 그는 4~7순위 정도에서 지명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8순위까지 지명되지 않았고, 9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처음부터 그를 노렸던 댈러스 구단 관계자들이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는 후문.

2018 드래프티 중에서는 덴버 너게츠의 14순위 지명자 마이클 포터 주니어, 보스턴이 27순위로 데려간 로버트 윌리엄스가 스틸픽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포터 주니어는 한때 전미 유망주 랭킹 2위까지 올랐던 선수고, 윌리엄스는 한때 로터리 픽 내지 1라운드 중후반 지명이 예상되었던 바 있다.

혹자들은 마이클 조던이야말로 ‘NBA 역사상 최고의 스틸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던은 1984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가 조던 대신 샘 보위를 지명하면서 불스가 조던을 영입할 수 있었다. 포틀랜드는 이미 클라이드 드렉슬러라는 걸출한 스윙맨을 보유했기에, 포지션이 겹치는 조던 대신 빅맨이었던 보위를 지명했던 것이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샘 보위는 리그 역사에 별다른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렸고, 마이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성장, 아직까지도 ‘농구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3) 순수하게 지명 순위로만 따지는 경우

‘스틸픽’의 정의 중에는, 먼 훗날의 관점에서 순수하게 지명 순위만 놓고 스틸픽 여부를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충분히 상위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스틸픽으로 평가 받는 경우다. 이 경우는, 아예 처음부터 하위픽으로 데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사례 1)과는 조금 다르다.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다. NBA 역대 최고의 스틸픽을 논할 때, 코비 브라이언트(1996 드래프트 13순위)나 스티브 내쉬(1996 드래프트 15순위), 존 스탁턴(1984 드래프트 16순위), 덕 노비츠키(1998 드래프트 9순위) 등을 거론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각보다 드래프트 순위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슈퍼스타 반열에 합류한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코비 브라이언트의 경우를 보자. 코비는 1996 드래프트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된 후, 곧바로 LA 레이커스에 트레이드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고졸신인들의 주가와 신뢰도는 높지 않았다. 심지어 13순위 지명도, 원래 기대치보다는 높게 뽑혔다고 봐야 한다. LA 레이커스가 블라디 디박을 내주는 대가로 코비를 데려오기로 사전합의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레이커스 단장이었던 제리 웨스트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대목.

스티브 내쉬는 어떨까. 데뷔 당시만 하더라도 내쉬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다. 운동능력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에 NBA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선수였다. 물론 당시에도 슛과 패스를 강점으로 지니고 있었지만 빅리그에서 통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게다가 대학 4년을 모두 마치고 왔다는 것 또한 성장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1996 드래프트가 역대 최고 수준의 뎁스를 자랑했기에 내쉬가 상위픽 사이에 낄 틈은 없었다. 그래서 15순위로 뽑혔던 것이다.

존 스탁턴도 내쉬와 같은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존 스탁턴이 대학 때의 기량 그대로 지금 드래프트에 참가한다고 해도 Top 5 픽을 장담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디안드레 에이튼, 루카 돈치치 등과 같이 나온다면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다. 또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손꼽히는 1984년에 등장했기 때문에 더 순위가 낮아진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노비츠키는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 받은 유망주이기는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건너온 선수들에게 높은 픽을 행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1998 드래프트에서 1순위 마이클 올로워캔디부터, 대학농구를 주름잡았던 마이크 비비, 리프 라프렌츠, 앤트완 재이미슨, 빈스 카터가 차례로 지명되었음을 생각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유망주 노비츠키의 9순위는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폴 피어스가 10순위였는데, 그보다 앞서 지명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코비, 내쉬, 스탁턴, 노비츠키 등의 경우를 잘 생각해보자. 이들은 루키 시즌부터 당장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다만 차근차근 성장하여 리그 역사를 빛낸 별들이 되었다. 또, 애초에 로터리 픽 언저리에서 호명되었을 만큼, 어느 정도의 기대치는 안고 있었던 선수들이라고 볼 수 있다.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이들 역시 스틸픽의 정의에 부합하지만, 1라운드 후반 지명자나 2라운더 선수들과는 좀 다른 케이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이런 케이스들까지 스틸픽으로 친다면 어떨까. 그런 논리라면 클라이드 드렉슬러(1983 드래프트 14순위), 칼 말론(1985 드래프트 13순위), 스테픈 커리(2009 드래프트 7순위), 데미언 릴라드(2012 드래프트 6순위) 등 로터리 언저리 혹은 그 이내에 뽑혔던 슈퍼스타들은 전부 다 스틸픽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5순위 이후 지명되어 성공한 선수는 다 스틸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봐도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지명순위에 따른 각각의 기대치가 있는데, 이를 뛰어넘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틸픽의 정의는 어렵고, 기준은 모호하며, 사례는 다양하다.

 

4) 일찌감치 알박기

드래프트 용어 중에 ‘알박기’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부동산 땅투기 수법을 일컫는 말인데, 최근에는 스포츠계에서도 널리 쓰인다. 특급 유망주에 대한 권리를 미리 확보하는 행위를 뜻한다. 과거에는 지역연고 드래프트를 통해 해당 프랜차이즈가 있는 지역의 유망주들을 선점하는 방법으로 이용됐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유럽 유망주 영입에 많이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 알박기란, 유럽 유망주를 선점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따라서 유럽 유망주 알박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유럽의 어린 유망주들의 경우, NBA 드래프트에 지명되었다고 해도 바로 입성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편이다. 그보다는 유럽에서 몇 년 더 시간을 보내며 기량을 갈고 닦은 뒤, 준비가 되면 NBA 무대에 노크하는 경우가 많다.

크리스탭스 포르징기스(2015 드래프트 4순위)와 같이 준비가 된 선수들은 NBA 드래프트와 동시에 신인으로 데뷔하지만, 리키 루비오(2009 드래프트 5순위)만 하더라도 바르셀로나에서 2년간 더 경험을 쌓은 뒤 2011-12시즌이 되어서야 NBA에 입성했다. 2014 드래프트 1라운드 27순위로 피닉스 선즈에 지명되었으나, (그 사이 권리가 넘어가는 바람에) 2017-18시즌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데뷔한 보그단 보그다노비치 역시 알박기 케이스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알박기 실패 사례는 훨씬 더 많다. 알박기를 할 때는 보통 1라운드 하위픽이나, 2라운드 픽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패해도 큰 부담이 없는 지명권을 활용해 일종의 도박성 지명을 한다는 것이다. 2005 드래프트 1라운드 11순위로 올랜도 매직의 부름을 받았지만, 아직까지도 NBA에 합류하지 않고 계속 유럽에서만 뛰고 있는 프란 바스케즈 같은 경우도 있다. 2005 드래프트 2라운드 46순위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지명된 이라짐 로벡 또한 아직 NBA 팬들에게 인사를 하지 못했다.

가장 유명한 알박기 성공 사례로는, 1999 드래프트 2라운드 57순위 마누 지노빌리, 2002 드래프트 2라운드 56순위 루이스 스콜라, 2007 드래프트 2라운드 48순위 마크 가솔 등이 있다. 이들은 역대 최고의 스틸픽을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드래프트 지명 이후 유럽에서 경험을 쌓은 뒤 NBA의 문을 두드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덴버 너게츠의 올스타 빅맨 니콜라 요키치(2014 드래프트 2라운드 41순위 / NBA 데뷔는 2015-16시즌)가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 역대 최고의 스틸픽을 찾아라!

지금까지 가장 널리 쓰이는 스틸픽의 대표적인 정의 4가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공통분모가 있다면 역시 ‘성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그 누구도 실패한 선수에 대해 스틸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역사상 최고의 스틸픽 사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1라운드 후반에서 올스타로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1997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팀 던컨을 지명한 이후, 단숨에 우승후보로 발돋움했다. 이에 따라 드래프트 상위픽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 이때부터 스퍼스는 1라운드 후반 및 2라운드 지명권을 적극 활용해 유럽 유망주들을 노리는 전략을 쓰게 됐다.

2001 드래프트 당시 샌안토니오는 1라운드 28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NBA가 29팀이었고, 1라운드가 29순위까지였음을 떠올리면 사실상 1라운드 마지막 픽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퍼스의 선택은 프랑스 출신의 만 19살 애송이 포인트가드 토니 파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파커는 빠르다는 것 외에는 장점이 없었다. 매 경기마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에게 혼나는 파커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파커는 2년차 때부터 팀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2003 파이널 우승을 맛보고, 2005년 다시 한 번 우승을 경험하더니 갑자기 농구에 눈을 떠버렸다.

2005-06시즌부터는 간단히 말해 사실상 1~2옵션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다. 올스타 선정은 기본이었다. 가공할 플로터, 믿기지 않는 페인트존 침투 및 마무리 능력, 한결 개선된 슈팅과 패스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2007 파이널에서는 유럽 선수 역사상 최초로 파이널 MVP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시카고 불스가 낳은 스타 지미 버틀러 또한 비슷한 케이스다. 2011 드래프트 1라운드 마지막 순번인 30픽으로 불스에 입단한 버틀러. 신인 시절의 버틀러는 출전시간을 얻기조차 힘들었다. 기본적인 공격능력이 매우 떨어졌고, 스윙맨임에도 외곽슛은 낙제 수준이었다. 첫 시즌 그는 고작 8.5분 소화에 그쳤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데릭 로즈가 계속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버틀러의 역할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버틀러의 주요 역할은 상대 에이스 수비였다. 3년차 때는 잔부상이 겹치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의 가능성이 폭발한 것은 4년차였던 2014-15시즌이었다. 모든 면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룬 해였다. 심지어 평균 20점의 벽을 깨뜨리며 당당히 리그 올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 지금까지도 리그를 대표하는 스윙맨 중 한 명으로 자리하고 있다.

 

2) 2라운더에서 올스타로

2라운드 지명자들은 대부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흙속의 진주는 있는 법. 부단한 노력 끝에 스타로 성장하는 2라운더들도 간간이 나온다. 2018 올스타전을 밟은 고란 드라기치는 2008 드래프트 2라운드 45순위 출신이고, 올스타 포워드 폴 밀샙 또한 2006 드래프트 2라운드 47순위였다. 2015-16시즌 퍼스트팀 센터에 선정된 디안드레 조던 역시 2008 드래프트 2라운드 35순위에 불과했다. ‘2017 올해의 수비수’ 드레이먼드 그린 또한 2012 드래프트 2라운드 35순위였다.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2라운더 성공사례 두 명의 인기는 정말 센세이셔널했다. 한 명은 2000년 드래프트 2라운드 43순위 마이클 레드, 또 다른 한 명은 2001년 드래프트 2라운드 31순위 길버트 아레나스다.

밀워키 벅스에 지명된 마이클 레드는 데뷔 초 레이 앨런의 백업 슈팅가드로 뛰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나, 가끔씩 폭발력을 보여주곤 했다. 2001-02시즌 휴스턴 로케츠와의 경기 4쿼터에만 8개의 3점슛을 폭발시키며 신기록(2015년 클레이 탐슨이 9개를 넣으며 경신)을 세웠던 경기는 전설로 남아 있다.

레드는 레이 앨런이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된 이후 간판스타로 성장했다. 2004년 올스타 무대를 밟는가 하면, 올-NBA 서드 팀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에는 평균 25점을 우습게 넣는 스코어러로 발돋움하며 무시무시한 기량을 뽐냈다.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에 미국 국가대표로 참가해 조국에 금메달을 안기기도 했다.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일찍 끝나버린 것이 아쉬웠다.

길버트 아레나스는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2000년대 중후반을 뒤흔들었던 슈퍼스타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평균 30점에 가까운 폭발적인 득점력,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 날카로운 3점슛, 한계를 모르는 슛 거리, 리그 최고의 클러치 능력 등 팬들의 눈을 사로잡는 무기가 많았다. 여기에 각종 기행(?)까지 어우러지니, 한국에서조차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될 정도였다.

1980년대 최고의 슈퍼스타로 명성을 날렸던 알렉스 잉글리시 또한 2라운더 출신이다. 잉글리시는 1976 드래프트 2라운드 23순위(당시는 1라운드가 17순위까지였음)로 밀워키 벅스에 입단했다. 애초에 기대치가 낮았던 것처럼, 데뷔 초기에는 그저 그런 벤치 멤버 중 한 명에 불과했다. 3년차 때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로 이적해 괜찮은 선발 멤버로 자리 잡았다.

그의 선수인생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 것은 4년차였던 1979-80시즌이었다. 잉글리시는 시즌 도중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된다. 덴버는 매우 빠른 색깔의 공격농구를 했는데,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잉글리시는 이때부터 펄펄 날기 시작했다.

잉글리시는 매서운 득점본능을 뽐내며 덴버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올스타 단골손님으로 성장했고, 1982-83시즌에는 평균 28.4점을 퍼부으며 득점왕에 올랐다. 1985-86시즌에는 커리어-하이인 29.8점까지 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80년대를 통틀어 총 득점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며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 부문의 끝판왕은 역시 아이재아 토마스가 아닐까. 새크라멘토 킹스는 2011 드래프트 60순위로 워싱턴 대학의 175cm 단신가드 아이재아 토마스를 지명했다. 60픽이면 사실상 버리는 카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토마스는 신인시절 같은 팀 동료 짐머 프레뎃(2011 드래프트 10순위)을 압도하는 활약을 펼쳤고, 결국 선발로 올라섰다.

이후 토마스는 피닉스를 거쳐 보스턴 셀틱스에 합류한다. 그리고 2016-17시즌 생애 최고의 한 해를 보낸다. 브래드 스티븐스 감독의 명조련에 힘입어 평균 28.9점을 기록하며 올스타는 물론이고 올-NBA 세컨드 팀까지 올랐다. 드래프트 마지막 순번인 전체 60순위 지명자가 이 정도 위치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3) 최고의 알박기 성공사례들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동구권 유럽 선수들의 NBA 진출은 보기 힘들었다. 냉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명성은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리투아니아(당시 소련 소속)의 아비다스 사보니스, 유고슬라비아의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 등은 국제대회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고, 이들의 기량은 NBA에서도 일찌감치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사보니스는 1980년대 중반 이미 세계 최고의 빅맨 중 한 명으로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유럽 무대는 그에게 좁아 보일 정도였다. NBA에서도 당연히 그의 기량을 탐냈다. 첫 번째 시도는 애틀랜타 호크스였다. 1985 드래프트 4라운드 77순위로 사보니스를 채가려 했다. 하지만 사보니스는 만 21세에 불과했고, 만 22세가 넘어야 지명이 가능했던 당시 규정(현행 19세)에 의해 지명이 무효처리되고 말았다.

이는 곧 다른 팀들에게 기회가 됐다.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는 1986 드래프트 1라운드 24순위 지명권을 활용, 사보니스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 때문에 사보니스는 미국으로 넘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사보니스는 1988년경 부상 치료차 포틀랜드를 방문하고, 구단과 함께 훈련을 하는 등 커넥션을 꾸준히 유지했다.

결국 사보니스는 1995-96시즌이 되어서야 NBA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만 31세였고, 무릎, 발목, 아킬레스건 등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보니스는 클래스를 증명하며 2002-03시즌까지 NBA 선수로 활약했다.

1986년 드래프트 당시 포틀랜드의 알박기 픽은 사보니스 한 명이 아니었다. 3라운드 60순위 지명권으로는 크로아티아(당시 유고슬라비아 소속)의 드라젠 페트로비치를 지명했다. 페트로비치 역시 냉전의 영향으로 인해 바로 NBA에 올 수 없었고, 1989-90시즌이 되어서야 포틀랜드에서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 페트로비치는 뉴저지 네츠(現 브루클린)로 이적한 후 기량을 꽃피웠으나, 전성기를 맞이하자마자 교통사고로 인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1987 드래프트에서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비슷한 알박기를 시도했다. 6라운드 127순위 지명권으로 소련의 사루나스 마르셜로니스를 호명한 것. 마르셜로니스 역시 페트로비치처럼 1989-90시즌에서야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특유의 ‘유로스텝’을 NBA 무대에 널리 전파시켰고, 이는 훗날 마누 지노빌리와 드웨인 웨이드, 제임스 하든 등을 통해 대중화 되었다.

토니 쿠코치는 1990 드래프트 당시 2라운드 29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되었다. 그 역시 유럽에서 시간을 보낸 뒤 NBA 데뷔는 1993-94시즌에 했다. 1995-96시즌부터는 시카고의 리그 3연패를 도왔고, 불스 왕조의 일원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알박기 얘기를 하는데 아르헨티나의 농구천재 마누 지노빌리의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샌안토니오는 1999 드래프트 2라운드 57순위 지명권으로 지노빌리를 ‘찜’했다. 지노빌리는 곧바로 NBA에 입성하지 않고 유럽에 남아 실력을 길렀다. 이후 지노빌리는 이탈리아 리그 MVP, 유로리그 MVP 수상 및 우승 등으로 유럽무대를 완전히 지배해버린다. 이어 2002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해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은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세계무대에서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어진 지노빌리는 드디어 NBA 샌안토니오에 합류하게 된다.

2002-03시즌 신인이었던 지노빌리는 패기가 넘쳤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NBA에 대한 적응이 더 필요했다. 또, 대단히 과감한 플레이를 자주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실수 때문에 그렉 포포비치 감독에게 자주 혼나기도 했다.

적응을 마친 2004-05시즌 지노빌리는 올스타가 되었고, 2005 파이널에서 신들린 활약을 펼치며 샌안토니오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이후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슈팅가드 중 한 명이자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도 스퍼스에서 현역으로 뛰며 전 세계 농구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마크 가솔도 지노빌리와 같은 케이스다. 2007 드래프트 2라운드 48순위로 LA 레이커스의 부름을 받았지만, 스페인 리그에 남아 기량을 더 연마하기로 했다. 이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2007-08시즌 마크 가솔은 눈부신 기량 발전을 이뤄내며 스페인 리그의 MVP가 되었다.

하지만 가솔은 레이커스에 입단할 수 없었다. 스페인에서 뛰는 사이, 레이커스가 그에 대한 권리를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트레이드했기 때문. 그래서 가솔은 2008-09시즌 멤피스에서 NBA 데뷔전을 치렀다. 

첫 3년은 적응기였다. 이후 가솔은 올스타로 성장했고, 2012-13시즌에는 ‘올해의 수비수’를 수상했다. 2014-15시즌에는 올-NBA 퍼스트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를 바탕으로 5년간 1억 1,320만 달러 규모의 초대형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리그 최고의 빅맨 중 한 명으로 군림하고 있다.

 

4) 편법으로 가로채기

앞서 잠시 언급하고 넘어갔던 지역연고 드래프트 이야기를 해보자. 이 용어는 프로야구 팬들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지역연고제 활성화를 위해 해당 지역연고 대학선수들에 대한 우선지명권리를 주는 제도였다.

과거에는 NBA에도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 1라운드 지명권을 사용해 지역연고 드래프트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의 경우, 1라운드 지명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필라델피아 지역 출신 대학선수를 미리 선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많은 레전드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드래프트되었다. 폴 애리진, 톰 헤인슨, 가이 로저스, 오스카 로버트슨, 제리 루카스, 빌 브래들리, 게일 굿리치 등이 지역연고제 방식으로 뽑혔다. 지금 소개할 선수는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케이스다. 바로 ‘신화 속 존재’ 윌트 체임벌린이다.

체임벌린은 고교 시절 이미 필라델피아 지역의 유명인사였다. 농구를 말도 안 되게 잘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NBA 선수들과의 일대일 경기를 압도해버린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심지어 농구뿐만 아니라 각종 육상 종목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니 유명세를 치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까지 나온 체임벌린이 당연히 필라델피아 지역에 있는 대학교를 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체임벌린의 선택은 캔자스였다. 필라델피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대학에 진학한 것이었다. NBA 지역연고 드래프트의 규정에 따르면, 해당지역에서 뛰고 있는 대학선수만 우선지명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現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캔자스로 간 체임벌린에 대한 우선지명권리가 없었다.

1959 드래프트를 앞두고, 체임벌린이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 필라델피아는 다른 팀들이 초특급 유망주인 윌트 체임벌린을 채갈까 노심초사했다. 구단주 에디 고틀립은 한 가지 꾀를 냈다. 체임벌린이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고등학교까지 나왔기 때문에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게 지역연고 드래프트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우겼던 것이다. 마침 캔자스에는 NBA 구단이 없다는 것도 어필했다. 결국 NBA 사무국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필라델피아는 1959 드래프트에서 지역연고 우선지명권을 활용해 윌트 체임벌린을 영입할 수 있었다.

지역연고 드래프트는 1965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편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78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셀틱스가 또 하나의 꼼수를 사용해 레전드를 낚는데 성공한다. 그 선수의 이름은 래리 버드였다.

버드는 1974년 고교 졸업 후 인디애나 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생활 적응에 실패해 한 달도 되기 전에 자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버드는 인디애나 주립대에 입학해 다시 대학생활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3년 후, 버드는 4학년을 다닐지, 아니면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래리 버드는 고교 졸업 후 4년이 지났기 때문에, 아직 대학 3학년 신분이지만 NBA 드래프트 지명 대상자가 되었다. 비록 자퇴하기는 했으나, 인디애나 대학에서의 1년에 인디애나 주립대 3년까치, 총 4년을 인정받은 것. 하지만 버드는 대학에서 마지막 1년을 더 뛰고 싶어 했다. 우승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NBA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지명이 될 수 있는 상태였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78년 드래프트 당시 인디애나(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포틀랜드에게 넘기고 3순위 지명권과 조니 데이비스를 받는 픽다운 트레이드를 단행했다)와 포틀랜드도 버드를 노렸었다고 한다. 하지만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버드를 건너뛰고 다른 선수들을 지명했고, 기회는 6순위 지명권을 가진 보스턴에게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보스턴의 레드 아워백 단장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1978 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 지명권으로 인디애나 주립대 3학년 래리 버드를 지명해버렸다. 드래프트 참가 의사를 밝힌 적이 없었던 버드는 당연히 셀틱스 합류를 거부했고,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4학년을 마저 뛰겠다고 했다. 보스턴은 한 시즌을 버리더라도 버드를 1년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1979-80시즌, 대학을 졸업한 버드가 마침내 셀틱스에 합류했다.

생각해보면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윌트 체임벌린을 영입한 것은 편법이었고, 보스턴이 래리 버드를 지명한 것은 꼼수였다. 하지만 어쩌면 스틸픽의 스틸(steal)이 지닌 ‘훔치다’라는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사진 = NBA 미디어센트럴, 나이키, 펜타프레스 제공, 도노반 미첼 인스타그램.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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